우리들의 희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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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암관리사업이나 국가암정보센터의 지원을 통해 도움을 받으신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소식은 나눌수록 희망이 커집니다.
제목 국가암정보센터 우수상(전춘옥)
 

국가암정보센터 우수상

 

 

2003년 1월 달 15일 아니 16일이었는지, 조금 오래되어 생각이 잘 안 난다. 오늘은 모처럼 시간을 내어, 건강의료보험에서 실시하는 종합 암 검진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그래서 하루 장사를 하지 않고 동사무소에 8시 20분까지 모여 출발했다. 기본 피검사, 유방암, 소변, 초음파 검사 등 등 하고 금식하다보니 배가 무척 고파 빨리 집으로 왔다. 얼마 지나 연락이 왔다. 유방에 조금 이상이 있으니 다시 2차 검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청천벽력이었다.


 서둘러 큰 병원에 왔다. 외과에 접수를 하고 또, 기본검사와 초음파를 했다. X-ray를 찍고 초음파를 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아줌마, 몇 살 이예요? 아저씨가 뭐 해요? 자식이 몇 명이예요?” 하고 물으셨다. 이상한 생각에 빨리 말해 달라고 재촉했다. 의사선생님께서 “아줌마 유방암이에요.” 95%가 유방암이라고 했다.   앞이 캄캄해지며, 마구 쏟아지는 눈물은 금방이라도 홍수가 날 정도였다. “선생님 너무 늦었어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라며, 늦지도 빠르지도 않다고 했다.

 딱 이 정도에 환자들이 알고 온다고 했다. 정말 너무 슬펐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시련이 한번은 오기 마련이지만, ‘왜 나한테?’라는 생각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애타게 기다리는 친정엄마께서는 “병원에서 뭐라 카드노?”하고 물으셨다. “엄마, 유방암이라요.”대답했다.“뭐? 아이고, 어쩌면 좋노.” 가문에 없는 중상이라며, 불쌍하다고 하셨다.

‘온갖 고생 다하며 열심히 살려고 하는 나에게, 왜 이토록 힘들게 하는 암이 왔을까?’장사를 접어두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또 종합검진을 마치고 다음날 입원을 했다. “어쩌면 좋아?”, “무섭고 힘들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보자.”서로가 격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간 안정을 찾았다. 사랑스런 딸들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형제들, 착한 우리 남편, 가족들이 있었기에 치료를 선택했다. 막상 입원을 해 수술날짜가 잡혀 수술을 하려고 하니, 유방암에 걸려 가슴을 도려내야 한다는 절망감, 세상과 이별한 날이 곧 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공포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절망스런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빈 방을 무엇으로 채우랴.’ 갑자기 못 견디게 쓸쓸해지는 야릇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 희망을 갖자.’ 나는 암이 걸리면 무조건 빨리 죽는 줄만 알았다. 수술이 다가오니 안절부절 하게 되었고,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선택되었을까?’ 절망감이 밀려왔다.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 끝내 '엉엉엉’하고 울게 되었고, 그간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다음날 의사선생님께서는 암 크기가 커서 다 절개해야 할 것 같다며, 암 덩어리는 2.5cm, 유방암은 2기에서 3기말 사이, 생존율은 75~80%라고 하셨다. 나는 좌절하지 않고 웃으면서 “예쁘게 꿰매 주세요.” 했더니, “아줌마 여유 있네요.”하신다.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이었다. 그때가 2003년 3월 5일 하루 종일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고, 유방 한 개라는 이유 때문에 더더욱 아팠다. 하지만, 일주일, 열흘이 지나면서 좀 덜 아팠고 ‘시간이 흐르면 되는구나. 살았구나.’하며, 희망을 가졌다.

  옆에 따뜻한 남편, 소중한 가족이 있기에 이런 희망도 완치도 가능할 수 있었다. 나는 유난히도 다른 환자들보다 참을성이 없어 진통제를 48대 맞았다. 기록이다. 간호원들도 의사도 놀라, 우리 병원에서 진통제를 많이 투여 받은 걸로는 아줌마가 신기록을 세웠다고 했다.

 

 고생을 함께 하고 희망을 준 남편 때문에, 용기를 갖고 열심히 치료받았고, 쉽게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희망을 가지자. 즐겁게 웃으며 살 수 있는 그 날까지,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자.’하며,  긍정적이고 착한 마음을 먹고, 1차 항암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항암치료는 총 20번 , 한달에 2번 외래에서 받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구토와 메스꺼움은 견디기 힘들었다. 치료가 계속되는 동안, 내 생활은 정상이며 나의 감정조절 능력에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는데도, 곧바로 우울증 증세가 찾아왔다. 하나뿐인 유방 때문에 자꾸 속상하고 눈물이 나고, 그냥 짜증이 났다. 유방암 재발의 원인이 되는 에스트로겐이 유방에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했다. 그로 인한 갱년기 장애로 홍조, 수면장애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남편이 생각 중에 조심스럽게 좀 더 보람 있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봉사의 길을 택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지만, 힘도 있고, 용기도 있어.”웃으며 말했다. 새마을 부녀회원이 되기로, 보람과 즐거움도 함께 남을 도우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흐를 때 말할 수 없이 행복했고, 봉사활동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암에 걸렸다는 경험은 겸손과 강인함을 가져다 줬고, 힘든 봉사도 좋은 활력소가 되었다. 남에게 마음이든, 물건이든 좋은 것을 주면, 준만큼 더 좋은 것이 나에게 채워지듯, 진정한 봉사자의 마음가짐을 갖추고 싶었다. 남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의 손길로 다가가고 싶었다.

 봉사와 함께 시작한 항암치료는 여유 있게 끝나고, 세월은 흘러 3년 6개월이 지났다. 그러자, 6개월에 한번씩 받던 정기검진 중에 피검사가 안 좋게 나와 PET-CT를 찍었다. 좋지 않은 결과가 또 다시 찾아왔다. 재발이었다. 가슴 갈비뼈 3번에 2.5cm 혹이 있어 수술을 권했다. 의사는 그래도 국소 부위라서 천만다행이라며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으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암이 재발해도 수술이 가능한 경우라 다행이라고 하셨다.


 수술시간은 4~5시간 걸렸다고 했다. 막상 수술을 하고 보니, 폐흉막 뒤에 0.5~0.7cm정도 잔잔한 혹이 있어 아주 힘든 수술이었다고 한다. 그 어떤 것도 아픈 고통만큼은 대신 할 수 없었다.

 그 때가 2006년 9월 30일, 수술한 나를 보고 엄마는 “어쩌면 좋노. 오래 살아야 한다.” 엄마 먼저 앞에 죽으면 불효라고 강조하면서, “엄마가 어떻게 해 주어야 하노.”하면서 통곡했다.

“오래 살 거예요. 의술이 발달되고 좋잖아요.”나는 빙그레 웃었다.

 조금씩 조금씩 회복이 되어, 또다시 항암치료를 하게 되었다. 항암치료의 고통은 일주일은 지옥, 열흘은 천당이었다. 지옥, 천당을 반복하면서 6번을 받아야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이토록 고생을 해서 생명연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주사액이 몸으로 들어오면 코가 시큰거리고, 몸이 덜덜 떨렸다.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세포들도 공격해 그 중 활성도가 높은 조직에 손상을 주게 되며, 모발이 크게 손상된다고 했다.


  몇 달간의 치료를 끝내고 난 직후, 환자들은 대게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진이 빠진 상태다. 유방암을 위한 통상적인 암치료과정은 저승을 다녀온 경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머리 빠진 내 모습을 불쌍하게 바라보았고, 나는 사람들 모두를 대면하기가 두려웠다. 병 그 자체가 부끄럽고, 살기 싫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지켜보는 가족들과 남편은 묵묵히 기적을 바라며, 용기. 희망, 행복한 웃음도 함께 주었다.

 

 2007년 2월 17일 항암치료를 마치자, 곧바로 방사선 치료가 결정되었다. 28번의 방사선치료, 45일간을 입원해야 했다. 나는 입원하기 전에 치료를 거부했지만, 의사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고, 일주일간 퇴원이 결정되었다.

 너무 너무 좋았다. 소중한 가족을 위해 모처럼 시장에 갔다. 분위기도 바꿀 겸 가족을 위해 상을 차렸다. “역시 우리 엄마가 최고야.”하며, 참 오래간만에 웃는 가족들을 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새마을 부녀회 회원들한테는 미안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부녀회장 사표를 내기 위해 월례회도 참석했다. 하기 싫어서 그만 둔 게 아니고, 병이 나서 못한다고 생각하니, 병든 내가 너무 너무 창피했다. 회장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봉사는 할 수 있다고 다짐하고 용기를 가졌다.


‘일주일이 왜 이토록 빠를까?’방사선 치료를 위해 다시 병원에 오니, 환자 모두가 친구였다. 방사선 교수님께서 시뮬레이션을 준비하시며, 간단한 검사를 하자고 했다. 6주 과정의 방사선 치료가 결정되었다. ‘마지막 치료다.’라고 생각하니 즐겁게 치료할 수 있었다. 방사선 치료를 10번 정도 했을 무렵, 간단한 검사 결과 중, CT상에서 갑상선 장애가 있다고 초음파 조직 검사를 하자고 하셨고, 며칠 뒤 병원장선생님과 면담이 결정되었다.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갑상선 샘 악성종양’이라고 하셨다. 나는 암의 재등장에 화들짝 놀랐고, 억장이 무너져 할 말을 잃었다.


‘또 수술을 해야 한다고!’나는 담담하게 “교수님 수술하기 싫어요. 이제는 안할래요.” 그냥 이대로 치료하면서 죽고 싶다고 했더니, 교수님 화를 잔뜩 내시며  소리치셨다.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고 희망이 있는데, 용기 없는 소리한다고 막 야단을 치셨다. 남편이 다가와 의사선생님 말씀대로 수술하자고, “당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아주면 안 되겠노?”라고 부탁했다. 정신을 차리고 그때서야 어떤 고통이 오든지 감수하며, 남편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수술은 결정되었다.

 2007년 3월 16일 3시간 반 걸리는 대수술을 했다. 항암치료 없이, 수술만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고맙게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회진 시간에 “교수님, 앞으로 5년 동안은 절대 안 아프고 편안하게 살 수 있나요?” 물었다. “물론이지. 그러기 위해 고통스러운 치료를 하고 있잖아. 왜 하필이면 5년이고? 10년, 20년은 살아야지.”, “교수님, 그런 생각은 꿈도 안 꾸어요.”, “왜? 꿈 꿔봐. 이룰 수 있어.”하시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뭐 그렇게 짧게 생각하노? 20년은 더 살아야지.” 병실 형님들은 “너무 짧았나?”하시며, 갑자기 병실이 희망찬 웃음바다가 되었다. 


  갑상선 치료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고, 다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다음날 방사선 치료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같은 병실에 젊고 예쁘고 착한 새댁을 만났다. “언니, 유방암인데 1년 6개월이 지나서 폐암으로 전이가 왔어요. 어쩌면 좋아요? 신랑하고 이혼하고, 초등학교 5학년 딸하고 둘만 살아요. 치료비도 걱정되고, 어떻게 살아갈지 정말 막막해요.” 새댁은 울고 또 울면서 말했다. 어떻게 도와줘야 될지 생각했다.


 마침 국가암정보센터 안내지가 눈에 띄었다. 국가암정보센터 1577-8899로 전화를 걸어 암 관련 정보를 상세히 전해 들었다. 상담원선생님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정보를 제공해주셨고, 나는 보이지도 않는 전화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바로 이런 혜택이 새댁한테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부푼 가슴에 빨리 말하고 싶었다. 동사무소에 일단 문의하고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상세히 알려 준대로 보건소에 접수를 했다고 했다. 폐암 환자는 100~200만 원 정도 보조금을 준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국가암관리 암환자의료비 지원사업이 예쁜 새댁한테 경제적 도움을 주게 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치료하는 방법 하나하나 속 시원히 알려줘 정말 감사했다. 이런 좋은 혜택 방법이 있는데, 모르는  암환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좋은 국가암정보센터가 있는 줄 모르고 걱정했어요. 국가암정보센터에서 혜택주고 도와줘서, 금방이라도 병이 다 낫겠어요.” 조금이나마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니 새댁은 환한 웃음을 지었고, 걱정 없는 새댁 모습은 정말 예뻐 보였다. 병실에서 알았지만, 지금은 친동생처럼 걱정하고 서로서로 위안이 되어 치료하고 생활했다. 치료를 받는 몇 달간,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가 끝나는 날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씩 국가암정보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곤 한다. 너무도 알기 쉽게, 특별히 궁금한 상황이 있으면 속 시원하게 알 수 있어 좋다.


 가족들의 환호성과 축하를 받으며, 드디어 퇴원하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4월 7일! 나에게 유방암 진단과 치료의 과정은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시기였다. 가족에게 꼭 필요한 엄마, 아내로 살고 싶다. 열심히 치료하고 살아가면서, 봉사하고 나누며, 후회 없는 생애를 마감하고 싶다. 장기 기증협회에 전화를 걸어 장기기증 시신기증을 신청했다. 일주일 뒤 장기기증 협회 카드를 소지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과 매월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친목을 도모하며, 투병생활의 애로사항에 대해 활발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위로를 나누고 있다. 남들보다 자주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일반인과 다를 게 없이 생활한다.

 

 2007년 10월 15일, 전화문자가 왔다. 국가암정보센터에서 온 문자였다. 암수기공모에 관한 홍보문자였다. ‘한 번 적어볼까?’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국가암정보센터에서 얼마 전에 도움 받은 예쁜 새댁이 생각나 알리고 싶었다. 이제는 어려운 암 환자, 혜택 받지 못한 암 환자를 위해 널리널리 알리고 전해주고 싶다. 그래서 상세히 알아본 뒤, 한번 도전하는 마음으로 써보자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특히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애원한 우리 남편에게 너무 미안했다. 우리 남편에게 너무 미안해서, 병을 치료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망과 용기 행복, 사랑을 모두와 나누며 함께 하고 싶다. 이 수기로써 조금이나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끝으로 나를 치료해주시느라 애쓰신 병원의 여러 의사선생님들, 정말 이 분들께 대한 고마움은 말과 글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다. 또한 병동의 간호사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저와 같이 절망하는 같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정기 검진을 받으며 즐겁게 살려고 노력할게요. 몸 관리 잘하면서 운동 열심히 해 오래 오래 살겠습니다.”

 

최종 수정일 : 2011년 05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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